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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조리학과 의 역사(육식)

EDIN 2014. 2. 28.

 

 

호텔조리학과 의 역사(육식)

 

구석기시대의 원시인들은 빙하시대에는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에너지의 급원으로 수렵에 의하여 잡은 동물의 살을 먹고 살았다. 그 후, 기후가 따뜻해지고 빙하가 후퇴하여 북반구에서는 현재와 같은 기후가 지배적이 됨에 따라 숲이 우거지고 초원이 생기면서 영양소의 급원으로 식물성 식품이 많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사람은 잡식동물이 되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람은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가축화하여 식용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동·식물 식품의 생산에 의하여 영양적으로 균형이 잡힌 식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사람은 그 당시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의 차이 때문에 북방인종은 육식을 주로 하게 되었고, 남방인종은 식물성 식품을 주로 먹게 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게르만족은 목축을, 아시아의 동부와 남부에 사는 종족은 농업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농업을 주로 하는 사람들도 육식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돼지, 닭, 염소 등을 길러 필요할 때 식용으로 하였고, 수렵에 의하여 동물의 고기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은 가축이 고기를 제공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어떤 종류의 가축의 살은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는 집을 지킨다든지 애완용으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고기를 먹는 민족이 적어졌다.

소는 농경에 있어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동물이므로 존중되어 고대 이집트, 로마, 인도,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소를 농경신 의 신성수로 정하고 이를 도살하거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이 영을 범하는 자는 처벌되었다.

 

 

돼지는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어 고기를 먹는 것을 계율로 금하고 있으며, 돼지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 이유는 유목민인 이슬람교도들은 농경민을 경멸하여 사육하는 돼지까지도 싫어한 결과이다.

말은 전차를 끌고 귀족이나 무사가 타고 다니는 동물이므로 존중되어 게르만족에 있어서처럼 군신에게 바치기도 했으나, 그 고기는 먹지 않았다, 당나귀나 낙타를 먹는 일은 예로부터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그들이 기르는 염소를 죽이지 않고 젖만 짜서 먹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원주민은 닭을 신의 사도라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는다.

 

 

한국은 북위33~43'인 온대지방에 위치하고, 그 위에 3명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연안에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흐르므로 예로부터 어패류를 많이 식용해 왔다. 한편, 지세로 보아 광대한 목축을 경영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조육류를 수렵이나 소규모의 목축 또는 가축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렵에 능한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아 수조 육류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였고, 그 조리법도 발달하였다. 후한서, 위지 동이전에 한 이나 부여가 소와 돼지를 잘 기른다는 기록이 있고, 수서, 백제조 에는 소, 돼지 닭이 많다 했고, 일본서기 에 스이코왕 7년 백제에서 낙타, 당나귀, 양 등을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한국에서 육식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때부터 시도된 목축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어 소와 말을 사육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 기록된 음식지미방 과 그보다 약 반세기 후에 기술된 증보산림경제 에 수조육류를 주잴로 한탕 과 갱, 그리고 숙육법 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옛날에 시작된 육식이 게속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시대 건국초기에는 불교를 호국신앙 으로 숭상하였으므로 수렵이나 가축의 도살을 즐겨 하지 않았고 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모두 육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미리 도살하여 비축해 두었던 육류를 적기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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